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학 농민 혁명 (문단 편집) ==== 전주성 함락 ==== ||[[파일:홍계훈의 경군.jpg|width=300]]|| || 홍계훈의 경군 || 1894년 4월 27일 황토현과 황룡촌에서의 전투로 사기가 충천하여 기세가 오른 전봉준의 동학군은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기세를 몰아 파죽지세로 전라감영이 있는 [[전주성]]에 무혈입성한다. 이때 전주성을 지키고 있던 전라감사 김문현은 이미 도주하고 전라도 전역은 완전히 동학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. 조선에서 전주성은 전라북도와 일대 지역의 주요관문이자 한양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조선왕실인 [[전주 이씨]]의 본거지라는 점에서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. 고부 이외에도 황해도의 [[황주군|황주]]와 [[해주시|해주]], 경상도의 [[김해시|김해]]에서 봉기가 일어났고, 충청도의 [[옥천군|옥천]]과 [[대전광역시|회덕]]에 이어 [[천안시|목천]]과 [[보은군|보은]] 등지에서도 동학군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봉기가 일어났다. 물론 농민군을 싫어하는 고을들도 많았다. 일례로 나주에선 나주목사 민종렬이 관군은 물론 민보군(民堡軍)[* 동학군을 막기 위해 지역 양반들이 주도해서 만든 민병대.]과 향병대까지 동원해서 동학군을 필사적으로 거부했으며[* 당시 나주는 대대로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하고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이 심한 고을이었다. 나주목사 민종렬을 위시한 관군의 강한 저항과 나주의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동학군은 결국 나주를 점령하는 데 실패한다.], 전북에서는 [[남원]]도 반발하였지만 [[나주]]와는 달리 [[남원]]은 [[김개남]]에 의해 무력 점령당했다. 이때 도마 [[안중근]] 의사도 동학군 진압에 참여한 적이 있다.[* 안중근 의사의 부친 안태훈은 이때 동도서기론을 지지하는 온건 개화파이면서 근왕파 유생이었기 때문에 동학 조직이 주도하는 농민군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노선을 취했다. 독실한 [[천주교]] 신자여서 그랬다고 알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, 이 시기는 아직 안태훈 일가가 천주교에 입교하기 이전이었다. 또 안중근이 사형 직전에 쓴 《안응칠 자서전》을 보면, '''안중근은 농민군과 [[일진회]]를 동족으로 알고 있었다.''' 같은 동학 출신인 건 맞지만...] 하지만 동학군이란 이름으로 약탈질을 하던 자들도 있었기에, 농민군을 막은 걸 무작정 뭐라고 비난만 할 수도 없다. 앞서 말했듯, 농민 봉기는 황건적이나 [[홍건적]]이 그랬듯 도적의 성격을 함께 가질 수밖에 없다. 특히 황건적, 홍건적, [[프랑스]] 초기 혁명군, [[러시아]] 적군, 중공 홍군 등... 기존의 국가 체계가 건재한 상황에서, 혹은 붕괴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'모든' 종류의 군사적 세력은 혁명 세력+그냥 배고픈 농민 세력+이 참에 한 몫 잡자는 도적들이 혼성된 군벌 집단일 수밖에 없다. 안정적인 보급 체계와 신상필벌 체계를 갖췄다면, 그건 봉기 세력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국가다.[* 농민이 시초도 아니고 봉기라고 할 수 없던, 양치기로 시작하여 농민도 일부 참여한 [[양치기]] [[십자군]]도 도적질을 저질러 결국 프랑스군에게 무수히 참살당하며 진압되었다...] 참고로 [[백백교]]의 시조 [[백도교]] 교주인 전정운은 바로 전봉준의 먼 친척이며, 전봉준과 동학의 이름으로 온갖 나쁜 짓은 다 저질러서 동학을 오해하고 진압군에 나서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. [[백범일지]]에 의하면 [[김구]](김창수) 또한 인천에 수감되어 복역할 당시 무뢰배에 불과한 사람이 동학의 두령이었다고 자칭하며 약탈, 살인 등 강도 행각을 무용담처럼 자랑하는 모습을 보며 한숨 지은 바 있다.[* 김구의 고향에서는 "창수가 동학하다가 끌려갔다"는 소문이 퍼져 있었을 정도. 참고로 창수는 김구가 젊었을 적에 쓰던 이름이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